노출과 질병과의 인과성을 파악하는 것(인과성 추론: causal inference)은 역학에서 핵심 주제 중 하나이다. 질병에 영향을 주는 요인을 올바로 파악하는 것은 예방에 필수적인 지식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잘못된 인과성에 기초하면 잘못된 예방방식이 적용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올바른 인과성을 적용함으로써 수많은 생명을 살린 적도 있지만 잘못된 인과적 지식을 적용함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된 적도 있다.
자료 분석을 통해 산출되는 연관성(association)은 노출군과 비노출군 각각에서 위험도를 파악하는 것이지만, 인과성(causality)은 동일 집단 내에서 노출되었을 때와 노출되지 않았다면 있었을 위험도의 차이를 의미한다. 그러나 동일 집단이 노출과 비노출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반사실적(counterfactural) 상황은 불가능하므로 서로 다른 집단에서(혹은 같은 집단을 다른 시간에) 관찰한 연관성을 근거로 인과성을 추론하게 된다 (무작위 통제시험은 서로 다른 집단의 비교가능성을 높여줄 수 있기 때문에 여러 연구방법 중 인과성 평가에 가장 우수하다). 즉 연관성(association)이 인과적(causal)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인과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인과성은 항상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일정한 조건들이 만족한 경우에만 가능하다. 우선 연구 대상자가 노출의 기회가 있어야 하는 실증성(positivity)을 만족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방사선 노출에 의한 건강 영향 연구에서 만약 여성 집단에서 노출이 없었다면 노출의 기회가 없어 여성에서는 방사선 노출과 질병과의 인과성을 파악할 수 없다. 그리고 비교하고자 하는 집단들이 노출 요인을 제외하고 비슷해야 한다는 인구집단의 교환가능성(exchangeability)이 필요하다. 만약 방사선에 노출된 두 집단의 성별 혹은 연령분포가 매우 다르다면(교환가능성이 없다면), 설령 두 집단 간 질병 차이가 관찰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방사선 노출에 의한 것인지를 판단하긴 어렵다. 따라서 노출의 기회가 있으면서 집단 간 교환가능성이 있는 경우(conditional exchangeability with positivity) 인과성 평가가 가능하다. 만약 인과성 평가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무리한 추론보다는 인과성 판단을 위해 무엇이 충족되어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역학에서 관찰된 결과는 개인보다는 인구집단에 근거한다. 즉 역학에서는 집단적 인과성 파악이 주된 목적이며 개인적인 인과성 파악은 집단적 결과를 활용하여 부차적으로 적용한다. 예를 들어 역학연구를 통해서 개인적 차원에서의 방사선 노출에 의한 암발생 여부 자체를 판단할 수 없지만, 인구 집단적 결과를 통해 개인적 차원에서 방사선 노출에 의한 암발생의 위험도(risk)를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역학에서 특정 개인에 대한 인과성의 직접적인 답을 찾는 것은 무리이다. 간혹 역학을 둘러싼 인과성 논란(집단정보를 개인에게 적용)은 역학이란 학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학 결과를 개인적 상황에 무리하게 적용하는 데서 발생한다.
인과성 파악은 현상을 보고 즉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비인과적 관련성의 가능성(바이어스 및 오류 등)을 배제한 후 판단할 수 있다. 따라서 인과성 파악을 위해서 노출과 질병과의 관련성에서 인과성 외에 다른 설명이 가능하냐는 근본적 질문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추론과 반박을 계속해 나가면서 인과성 추론을 정립해나가는 진지한 사고의 과정이 필요하다. 특히 무작위 시험연구가 아닌 관찰연구의 경우 더욱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인과성 파악 과정은 금광에서 금을 골라내는 작업과 비교되기도 한다. 즉 인과성은 자료 분석의 산물이 아니라(물론 자료 분석은 인과성 파악에 큰 도움을 준다), 연구자의 지식과 논리적 사고에 바탕을 둔 사고의 산물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과성 모델과 인과적 사고체계의 증진 및 연구 방법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질병은 단일 원인에 의해 발생하기보다는 위험인자, 환경 및 유전 요인이 함께 관여한다. 예를 들어 방사선 노출이 암을 발생시키지만 노출된 모든 사람에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개인의 신체 상태와 유전적 특성별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또한 100% 유전적 질환이라도 환경인자의 조절을 통해 질병이 발현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질병은 유전과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발생하며, 발생 원인에 영향을 주는 각 요인이 서로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상호작용)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질병 발생 모델은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노출과 질병의 인과성을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질병을 예방하는 전략에도 도움을 준다.
질병 발생 모델에 의하면 질병 예방을 위해 생물학적 기전을 완벽하게 이해해야만 예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나타낸다. 즉 질병 발생에 관여하는 많은 요인 중 일부만 파악하고 있어도 질병으로 연결되는 고리를 차단할 수 있어 예방에 활용할 수 있다. 따라서 모델이 복잡할수록 질병을 예방할 기회나 방식이 늘어날 수 있으며, 보다 정교한 모델을 만들어 내는 것은 질병 예방을 위해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이처럼 질병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학문(science)과 실제 적용(practice)으로서 예방의 관점은 다를 수 있다.
또한 질병 발생 모델에서는 질병의 원인을 가까운(proximal) 혹은 먼(distal) 원인으로 분리하기도 한다. 만성질환의 경우 질병 원인이 매우 다양한데 예를 들어 암 발생에 비만이 원인이며, 비만의 원인은 식이나 육체 활동과 관련되어 있고, 이러한 생활양식은 도시화나 고령화라는 사회 현상과도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질병 예방을 위해서 가장 가까운 원인(비만)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 원인(도시화 등)도 중요하다는 것을 모델을 통해 제시해 줄 수 있다. 모델에서 질병 발생과 원인 인자 사이에 여러 단계를 파악할수록 질병을 예방하는 방법이 많아진다. 또한 간혹 질병 관련된 직접적인 원인을 예방하기보다는 간접적인 원인에 대한 지식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
질병 발생 모델은 질병 원인에 대한 생각을 체계화한 틀로서 직선(line)모델, 삼각형(triangle)모델, 수레바퀴(wheel)모델, 거미줄(web)모델, 파이(pie)모델 등이 알려져 있다. 여러 질병 발생 모델 중 파이 모델(그림 5.1.1)은 다른 모델보다 다음과 같은 인과성 내용을 더 잘 설명하는 장점이 있다. 1) 하나의 파이는 여러 원인인자로 구성되었다는 도식을 통해 질병을 발생시키기 위해서는 여러 요인이 관여한다는 질병의 다요인설(multicasality)을 설명한다. 2) 질병 발생에 관여한 요인들이 서로 관련되어야만 발생한다는 것(interaction)을 말해준다. 이때 파이 내 원인 인자들의 관련성은 반드시 동시에 일어나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수년 전의 인자가 현재의 인자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3) 여러 요인 중 특정 요인이 다른 요인보다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각 요인들중 하나라도 빠지면 질병 발생으로 연결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차원에서는 질병 발생에 관여하는 요인인 이상 모두 질병 발생에 기여한 것이므로, 질병과의 강도(strength)가 강한지 약한지는 의미가 없고 단지 원인 인자인지 아닌지를 말해준다. 즉 질병과의 연관성 크기는 질병 발생이 집단에서 차지하는 분율로 파악되는 집단적 차원의 개념이지 개별 상황에서의 인과적 개념과는 구별된다. 4) 질병이 발생한 각 개별 상황에 관련된 구성요인들이 중복해서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각 인자 별 기여 위험도(attributable fraction)를 모두 더하면 100%를 넘을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다. 5) 원인적 노출 후 질병 발생이 일어나기까지의 기간인 유도기(induction time)는 어떤 원인 인자를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질병이 발생하기 바로 전 단계의 원인 인자는 유도기가 0에 가깝지만, 노출과 질병 발생 사이에 다른 여러 원인 인자들이 작용하는 경우일수록 유도기는 길어진다.
그림 5.1.1 특정 질병이 발생한 가상적인 3가지 상황(각 파이 내 구성인자는 질병을 발생시키는 데 작용한 개별 원인인자를 의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