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학(epidemiology)은 인구집단에서의 건강 혹은 건강 관련 요인들에 대한 분포와 원인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역학의 범위는 점차 확대하고 있어 최근에는 인구집단만이 아니라 동식물의 질병까지 포괄한다. 역학의 정의와 관련된 여러 표현이 있지만, 핵심 단어는 ‘건강’과 ‘인구집단’이다. 그러나 영어단어 자체는 그리스어 에서 유래된 인구집단에 대한 학문(즉 epi=upon, demos=people, ology=study)으로 인구 학과 비슷한 의미로만 해석되어, 역학에서 다루는 주제인 질병 및 건강이라는 내용은 분명하진 않다. 따라서 영어로는 ‘epidemiopathology’란 용어가 질병이라는 단어를 포함함으로써(pathos=disease) 역학이 의미하는 내용을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해 준다.
역학은 과학으로서의 학문(science)인 동시에 현실에 지식을 적용하는 실천(practice)이기도 하다. 학문으로서의 역학은 과학적 질문을 통해 지식을 확장해 나가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으며, 실천으로서의 역학은 얻어진 지식을 현실에 유용하게 적용하는 기능을 한다. 간혹 역학이 과학이라기보다는 다른 과학이나 전문분야의 방법론적 도구(수단)로만 오해되기도 하나, 방법이나 도구로서의 활용을 넘어서 이론과 가설에 근거한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 사고체계에 대한 과학이다. 특히 건강과 질병에 대한 가설을 세우거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여 인구집단에서 질병의 규모와 원인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역학이 과학적이지만 특성상 단순하고 분명한 결과를 제공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역학의 학문적 내용을 실천에 적용하는 경우에는 불확실성(uncertainty)을 인정하고 가장 최선의 판단을 추구하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역학은 개인이 아닌 인구집단에서의 질병을 생물학적 내용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요인까지 함께 다루므로 자역과학뿐 아니라 사회과학 분야와 연결된 다학제적 (multidisciplinary)인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역학연구는 특정 분야의 전유물이 아니다. 과거 다양한 분야의 전공자들이 인구집단에서의 질병을 진지하게 파악하고 합리적이며 창의적으로 사고함으로써 역학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듯이, 각 분야에서의 건강에 대한 인구 집단적 사고와 접근은 다양한 측면에서 역학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역학은 지식을 적용(application)하는 기술로서 질병의 예방과 통제에 이바지한다. 그런데 역학 결과물이 어떻게 활용되느냐는 그 사회의 몫으로, 결과의 현명한 활용에는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적 특성이 개입된다. 따라서 똑같은 역학적 결과라도 사회에 따라 다르게 적용될 수 있으며 역학의 현실적 적용은 학문적 측면의 역학과는 다른 측면을 가진다. 즉 특정 주제를 둘러싼 보건학적 문제를 풀어나가데는 역학만이 아니라 사회의 여러 분야가 관여한다. 예를 들어 방사선 역학(radiation epidemiology)의 일차적 목적은 방사선 노출 집단이 얼마나 높은 질병 위험도를 가졌느냐를 정확히 평가하는 데 있다. 반면 현실적으로 방사선 방호(radiation protection)의 실무적 적용에는 역학을 포함한 과학적 근거뿐 아니라 사회적 가치 및 상황들이 함께 고려된다. 따라서 인구집단적 차원에서의 방사선 노출로 인한 건강 및 질병을 탐색하는 것은 역학의 몫이지만, 그 결과를 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역학만이 아니라 사회 모두의 종합적 역할이다.
역학은 집단적 사고(population thinking)와 집단간 비교(group comparison)라는 특성을 갖는다. 역학에서의 집단적 사고는 개념(conceptualization)의 형태이고, 집단 비교는 학문적 활동(scientific activity)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역학 연구는 개인보다는 인구집단에 대해서, 실험보다는 관찰 연구를 통해서, 질적 보다는 양적 접근을 한다.
인구집단은 단순한 개체의 합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살아 움직이는 개체이다. 마치 원자의 구성이 분자를 이루고 분자가 세포를 세포가 기관을 기관이 개체를 이루는 과정에서 기관은 세포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 그 자체의 특성이 있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역학은 인구집단을 하나의 유기체로 살펴보면서 건강 및 질병 문제를 연구한다.
역학에서는 인구집단을 합리적으로 비교하기 위해서 확률이라는 개념이 적용되며, 이와 관련된 다양한 지표들이(incidence, prevalence, mortality, odds ratio, relative risk, attributable risk, excess risk 등) 집단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리고 집단정보를 합리적으로 해석하고 비교하기 위해서 여러 역학 방법론들이 사용된다. 또한 결과값을 논리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역학적 사고 과정 및 판단을 위해서 교란변수, 상호작용, 바이어스, 비교군 선정, 인과성 탐구를 위한 지침 등 집단 비교를 위한 개념들이 적용된다.
인구 집단적 사고는 질병 현상과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중요하다. 실제로 많은 질병이 사회적(집단적) 영향을 받는다(예를 들어 음주로 인한 간경화 등의 질병 발생은 개인적 요인들도 관여하지만, 사회적인 음주 허용 문화 및 술의 가격 등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집단적 정보가 질병의 원인을 해석하는데 개인적 정보보다도 더 유용한 경우들이 많다. 예를 들어 감염성 질환의 규모 및 전파력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인구밀도 및 가족의 식구 수 등 집단적 정보가 그 개인이 특정 음식을 섭취하거나 혹은 손을 씻었는지보다 중요할 수 있다. 이것은 개인의 질병 원인이 집단의 질병 원인과 반드시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개인에 대한 건강 문제는 개인만을 바라보아서는 완전히 얻지 못하고 그 개인이 소속된 집단의 정보를 다른 집단과 비교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약 모든 사람이 담배를 피운다면 폐암은 단지 유전적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고 정말 중요한 흡연의 영향에 대해서는 파악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집단의 정보를 파악하는 것은 각 개인의 유전적 요소 및 특성을 파악하는 것보다 중요한 경우들이 많다. 즉 노출과 질병의 올바른 관련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노출이 비슷한 집단만을 대상으로 많은 연구를 진행하는 것보다 노출 분포가 다른 여러 집단으로 확대할 때 비로소 파악할 수 있다.
개인에게 중요했던 위험요인이 집단에서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개인의 유전적 감수성은 개인의 질병 발생에 큰 영향을 주지만, 전체 집단에서의 질병 발생률은 환경적 요인이 더 크게 영향을 준다. 이러한 사실은 이민자 연구와 쌍둥이 연구를 통해서 잘 알려져 있다. 반대로 집단차원에서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지만, 개인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방사선 노출량은 개인적 차원에서 1-2 mSv 더 노출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지만, 집단적으로는 노출량을 줄이면 그만큼 질병을 예방할 수 있으므로 비록 1-2 mSv의 노출 감소라고 하더라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인구 집단적 사고를 통해 개인에게는 불확실한 것도 집단차원에서는 확실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정 인구집단에서 방사선 노출 증가로 인해 암 위험도가 증가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개인적으로 누가(개인적 차원) 암에 걸릴지는 불확실하다. 즉 방사선 1 Sv 노출시 대략 100명당 5명의 암사망이 증가한다는 사실은 많은 연구를 통해 입증되었지만, 누가 5명의 암사망자에 포함될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시 말해 개인적 차원에서의 암발생에는 우연(variation) 혹은 운(luck)이 작용하여 불분명해 보일 수 있지만, 인구집단적 차원에서는 방사선 노출 증가로 인해 암 환자가 증가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인구 집단적 특성은 질병을 예방하는 전략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다. 즉 개인적 차원에서는 고위험군을 집중하여 관리하는 방법이 권장될 수 있으나, 인구 집단적 차원에서는 전체를 대상으로 관리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예를 들어 고음주자들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예방 관리를 하기보다는 사회의 평균적 음주량을 줄이는 것이 전체적으로 음주로 인한 피해를 더 많이 줄일 수 있다. 즉 전체 인구집단 차원에서 질환자들을 줄이기 위해서는 개별 질환자들에 대한 접근보다는 그 인구집단 자체를 대상으로 위험요인을 전체적으로 감소시키는 것이 질환자들을 효율적으로 줄일 수 있다.
고위험집단은 질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지만, 전체 인구집단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낮아, 발생한 환자수로 보면 오히려 대부분의 환자는 저위험집단에 속해 있다. 따라서 인구집단 차원에서 보면 위험도를 적게 가진 일반 사람들에 대한 예방 대책이 많은 위험도를 가진 집단보다 사회적으로는 더 많은 이득을 준다. 예를 들어 비만자들은 만성질환의 위험도가 높지만 전체 인구집단의 일부만을 차지하며, 비만하지 않은 사람들은 만성질환의 위험도가 상대적으로 낮지만, 인구수가 많아 실제 발생한 만성질환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런 상황에서 전체 인구집단에서 비만도를 낮추는 예방전략은 사회적으로 질병 예방효과가 크지만, 개별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거나 매우 적은 이득만을 가져다줄 수 있다. 질병자의 대부분이 해당 질병의 위험이 낮은 집단에서 발생하고 고위험집단에서는 극히 적은 질병자가 발생하여, 인구집단 차원에서 큰 이익을 가져오는 예방대책이 참여하는 개인차원에서는 이익이 적어 마치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예방의 역설(prevention paradox)이라고 한다. 이처럼 개인과 집단의 서로 다른 효과 차이를 고려하는 것이 역학적 접근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역학에서 사용되는 집단정보에서 대표성(representativeness)의 확보는 중요하며 이를 위해 인구집단의 규모 및 분모를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인구집단은 시간에 따라 변하며 그에 따라 위험요인과 질병 현상도 변한다. 따라서 인구집단의 특성을 지속적으로 파악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연구하고자 하는 전체 인구집단을 대표하도록 선정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조사된 집단이 전체 모집단과 비교하여 어떻게 다른지를 파악하는 것이 올바른 결과 해석을 위해 필요하다.
방사선 방호를 위해 문턱 없는 선량 모델(LNT)을 기준으로 설정한 것도 집단적 개념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특정 개인에서 일정한 선량 이전 노출에서는 건강 영향이 나타나지 않다가 그 이상에서 영향이 나타나는 현상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인구집단에는 민감도가 다른 다양한 개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집단을 대상으로 한 단일한 역치의 방사선량을 설정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인구집단에서의 방사선 방호 목적으로는 문턱 없는 선량 모델이 지지되고 있다.
대부분의 역학 연구는 인구집단에 대해 관찰한 완전하지 못한 자료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완전하고 분명한 자료를 통해 결과를 산출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올바른 결과를 산출하는 것은 어렵다. 역학의 큰 특성 중의 하나는 이러한 불완전한 자료를 통해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데 있다. 현재 주어진 자료와 근거들로 과학적 추론을 내리는 것이 가능한지, 어느 범위에서 가능한지, 어렵다면 합리적 결정을 위해서 어떤 정보를 어떻게 확보하는 것이 필요한지 등에 관한 사고가 필요하다. 따라서 역학에서는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힘(logical reasoning)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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